[민은숙 칼럼] 금손 예찬

민은숙

수은주가 뚝 떨어졌다. 옷깃을 마구 파고드는 칼바람에 외출을 삼가고 있다. 동면에 빠진 한겨울 풍경만큼 나 또한 움츠린다. 신체리듬은 기가 죽었는데, 식성만 호기심이 잘도 살아난다. 입이 자꾸만 궁금하다. 먹는 양에 비해 나부댔던 뜨거운 날들에 보상이라도 하려는 걸까. 끼니 말곤 욕심부리지 않던 식탐이 주전부리에 손을 뻗는다.

 

유수 같은 세월 따라 부지불식간 노화한 나는 괄괄한 뙤약볕이 점점 힘겨워진다. 드러나지 않는 내부의 장기들도 고군분투하고 있었나. 여름만 되면 체중이 줄었다. 밤보다 긴 낮 동안 몸은 힘든 줄도 모르고 사부작거렸다. 반면 시퍼런 동장군이 들이닥치면 몸서리치며 문고리를 부여잡는다. 추위는 날 응고시키려 하고 나는 누에고치가 되어 방구석 폐인이 된다.

 

이불 밖이 위험하지 않지만 일용할 양식만 취하고 싶다. 오븐에서 갓 나와 윤기가 자르르한 호박고구마를 보노라면 꿀꺽 군침이 넘어간다. 세상을 순수로 장악한 설경을 휘감고 떠먹는 한겨울의 묘미인 아이스크림도 빼놓을 수가 없다. 북풍한설에 발목 잡힌 에너지가 몸 안에 지방을 축적할 절호의 기회를 엿본다.

 

한파가 온기를 압살하는 이 와중에도 귀차니즘을 질끈 동여맨 이십 년 지기가 있다. 주일만 쉬는 커리어우먼임에도 불구하고 친정을 주일마다 방문한다. 노총각 동생과 노쇠한 엄마를 위해 바리바리 음식을 싸 들고 가는 보기 드문 행보를 그린다.

탄수화물은 하얀 거짓말을 모방할 줄 모른다. 먹은 만큼 움직여 밖으로 배출해야만 속에 쓸모없는 지방을 축적하지 않는다. 겨울이면 늘어난 몸무게로 제 존재감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정직한 영양소이다. 언니는 탄수화물처럼 빤한 거짓을 모른다.

 

언니가 호출한 외식에 둘이 마주했다. 맛깔스러운 다양한 소스가 한몫하는 샤브샤브가 오늘의 메뉴이다. 보글보글 이목을 사로잡으며 끓는 육수에 채소를 한 움큼 집어넣는다. 억센 배추가 온기에 흐물흐물 감겨들면서 외피를 줄인다. 겉으로 보기엔 당차지만 속은 여린 배추 같은 사람이 바로 언니이다. 뜨거운 내면을 들여다보면 가족을 위해 센 기질을 누그러뜨려 희생을 자처한다. 주일만 쉬는 고단함에도 열악한 친정 식구를 위해 천금 같은 잠을 저축한다.

 

디지털과 더불어 주 5일제 근무가 자리 잡았다. 창세기에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한 하느님이 하루를 쉬었다는 주일만 언니는 쉰다. 그마저도 오전을 고스란히 친정에 헌납한다. 신보다 한발 앞서 실천하는 언니, 가끔은 지쳐서 물먹은 솜처럼 천근만근인 날도 있다. 그런 날에는 사람인 언니도 쉬고 싶다고 말한다.

 

팔팔 끓는 육수가 부글거리는 목소리로 얇게 썬 쇠고기를 투하할 때가 됐음을 알린다. 모여든 거품들이 에워싸자 핏기가 금세 가시는 고깃살이다. 서로에게 권하면서 수저를 집어 든다. 뜨끈한 국물이 찬 기운에 경직된 근육을 살살 이완시킨다. 올케가 둘이나 있고 언니도 있다. 금손인 언니가 해 나른 음식에 길들어진 모자는 한숨을 내보내며 투덜거린다. 사 먹는 것은 못 먹겠다, 입맛에 맞지 않는다, 형수가 해오는 것은 소태다 등등 들이대는 이유는 많다. 얼굴에서 핏기가 쏙 빠져나간 언니는 퀭한 눈을 앞세워 친정으로 발길을 향한다.

 

턱밑까지 꽉 채운 단추처럼 갑갑증이 차오른다. 오랜 지기이자 동생으로서 단추 하나 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엿새 동안 소진한 에너지 충전을 위한 명분 있는 주일이다. 쉼이 무색한 언니의 고단한 일상이 스위트 칠리 소소가 코로 삐져나온 듯 시큰하게 맵다. 아무리 친정 식구라도 호의가 반복되면 권리가 된다는 말을 소스에 콕 찍어주었다.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는 언니의 무색무취한 표정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금손인 언니의 손이 요리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한다. 동네의 귀감으로 삼을만하다. 곰손인 내 손은 누구도 두 번 다시 찾지 않는다. 반짝거리는 것은 모두에 선망의 대상이다. 하물며 그것이 값어치 나가는 묵직한 금이라면 동경의 눈빛은 피할 도리가 없다. 까칠한 장미 둘을 떠나 맘 편히 하루도 살 수 없는 언니는 작은 모충동 행성의 어린 왕자이다. 그녀가 길들인 친정의 입맛은 떼어낼 수 없는 껌딱지가 되었다. 마치 차가운 겨울이면 자연스럽게 따뜻한 국물을 떠올리며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고전적 조건형성처럼. 몸이 파김치가 되어도 냉정하게 외면하지 못하는 선한 영향력은 언니의 노역을 부른다. 아니다, 수정하겠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빠진 수레바퀴를 돌게 하는 고귀한 땜질이라고. 지구란 행성은 자전과 공전만으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다.

 

악한 끝은 없어도 선한 끝은 있다고 한다. 피곤하면 콩나물같이 머리부터 들이미는 것이 게으름이다. 언니는 근면이란 검은 천으로 그것을 덮어 특유의 근성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자존심 강한 장미꽃, 두 송이에 언니가 몸으로 보여주는 것은 헌신이다. 당신이 가진 것을 줄 때 그것은 주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주는 것은 당신 자신을 줄 때라 예언자는 말한 바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복지 사각지대인 음지에서 바지런한 금손을 내리꽂는 수은주가 아닌 뜨거운 가슴으로 품어주기를.

 

 

[민은숙]

시인, 칼럼니스트

제4회 코스미안상

제3회 문학뉴스 &시산맥 기후환경문학상

2024 중부광역신문신춘문예

청주시 1인 1책 펴내기 지도 강사

꿈다락학교 시 창작 강사

문화재단 & 예술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이메일 : sylvie70@naver.com

 

작성 2025.12.03 08:22 수정 2025.12.03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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