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가 시작되면, 제 강의를 수강한 학생들과 첫 대면을 하지요. 그 시간에 학생들에게 ‘따뜻한 기억 3가지’를 주제로 글쓰기 과제를 줍니다.
진부한 자기소개 방식이 아닌 기억 3가지를 매개체로 그림을 그리고, 4문장으로 설명하는 형식입니다.
학생들은 두 가지까지는 별 어려움 없이 떠올리는데, 대체로 세 번째 기억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경험 중 마지막을 고르기 어렵거나 반면, 따듯한 기억들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주어진 시간이 짧으니 대부분 미완성 그림이지만 그림을 말로 풀어낼 때 오히려 더 마음이 말랑말랑해지나 봅니다.
그림으로 한 번, 또 그려낸 것을 글로 쓰니 학생들도 부담스럽지 않은 듯합니다.
그런데 개강 후, 첫 수업에서 남학생 J는 세 가지의 기억은커녕, 한 가지의 기억도 쓰지 못했습니다.
수업 시간 중 과제를 완료해 온라인 게시판에 업로드 해야 하는데 J는 시한을 넘기고야 게시한 겁니다.
쓰는 시간이 더 필요한 학생도 있기에 저는 그러려니 여겨 별달리 코멘트 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다른 과제의 마감 시간은 잘 지키며, 우수한 성적으로 학기를 마쳤습니다.
그 후 일 년이 지났을 무렵, 연구실로 찾아온 J는 반갑게 인사하며 책 한 권을 건넸습니다.
표지부터 마치 화보집 같던 그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J로부터 설명을 듣는 동안, 부끄러움과 고마움의 감정이 교차했습니다.
그 때, 시한 내 과제를 업로드 하지 못하며, 그는 자신이 떠올릴 ‘따듯한 기억’하나가 없는 것으로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친구들처럼 일상의 추억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무감정해서인지 혼란스러웠다는 거지요.
그런데 친구들의 발표를 들으며 자신의 ‘따뜻함’에 관한 정의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는 겁니다.
그 일을 계기로 자신에게 일어난 ‘따뜻한’ 기억을 제가 지도한 대로 그림과 글로 엮었다고 합니다.
덕분에 제게 작은 책을 선물할 수 있게 됐다며,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그 ‘따듯함’을 평생 이해하지 못했을 거라는 고마운 인사를 했습니다.
선생으로서 학생들과 대면할 첫 수업에 어떻게 인상 깊은 한 장면을 만들지, 고심한 끝에 낸 과제를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오래 생각해준 J가 고마웠습니다. 책 한 권과 꽃 한 송이를 들고 선물처럼 찾아와 준 그가 선생에게도 큰 힘이 됐다는 걸 언젠가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한 사람이 성장하는 과정을 목격할 수 있다는 건 가르치는 사람의 특권이자 보람입니다.
J가 깨달음에서 그치지 않고 시야를 확장한 결과물을, 책의 형태로 창작한 실행력에 저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내면에서 솟구치는 추동의 힘으로 책을 쓴건 참으로 특별한 결과물이기에 말입니다.
제가 첫 책을 쓰는 과정도 그와 다르지 않아 한 글자, 한 글자 마음을 눌러 쓰는 작업을 하며, 저의 여러 모습과 인연이 돼 제 안에 머물던 분들을 다시 만납니다. 이처럼 책을 쓰는 작업은 타인에게 비춘 자신과 마주 서는 일입니다.
강의실에서 같은 주제를 얼마나 깊이 골몰해 보느냐의 차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던 길목에서 어떻게 감사를 느끼고 표현하느냐의 차이가 때로 우리를 삶의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하는 건 아닌지, 고운 책장을 넘기며 그의 ‘감사’에 ‘감사’를 포갭니다.
K People Focus 김윤경 칼럼니스트 (ueber35@naver.com)
| 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전공 학사, 석사, 박사
| 미국 RISD(Rhode Island School of Design) 디자인교육학 석사
| 포토 에세이북 『두 개의 시선』
| 출간 [가르친다는 건 곧 사랑한다는 것] / 에피쿠로스의정원
|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 30년 재직, 2026년 8월 정년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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